10월 09일 (금)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가, 삶보다 잔인한가 포크너의 ‘에밀리를 위한 장미’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록 :2026-09-10    조회수 153

정갑수

본문

 

사랑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가장 잔인하게 파괴한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인간을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게 내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랑은 집착이 되고, 소유가 되며, 비극이 된다.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소설 「에밀리를 위한 장미」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쓰였지만, 사랑의 끝에서 인간이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아 있다.



에밀리는 사랑하는 호머 배런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녀가 택한 방법은 사랑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사랑을 영원히 고정시키는 것이다. 호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신을 떠날 수도 있지만, 죽은 사람은 떠날 수 없다. 에밀리에게 죽음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완성하는 마지막 장치가 된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사랑의 박제에 가깝다.



에밀리는 시간을 멈추려 했다. 변하는 사랑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이용해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자기 곁에 붙잡아 두었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충격적인 장면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간이 사랑을 소유로 바꾸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지점이다.



반면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는 살아 있는 사랑을 선택한다. 그녀에게 브론스키와의 사랑은 체면이나 사회적 지위보다 중요했다. 남편 카레닌과의 결혼, 사교계의 명예, 어머니로서의 위치까지 그녀는 사랑을 위해 내놓는다.



그러나 문제는 사랑이 모든 것을 버린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안나는 사회의 위선과 맞서면서 사랑을 선택했지만, 그 사랑 안에서도 불안과 질투와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결국 그녀가 잃은 것은 사회적 명예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삶의 균형마저 무너졌다.



그래서 안나의 비극은 단순히 불륜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 하나에 삶 전체의 의미를 걸었을 때 사랑이 흔들리면 삶 전체가 함께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에밀리와 안나는 사랑을 위해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에밀리는 죽음을 이용해 사랑을 영원히 붙잡으려 했고, 안나는 살아 있는 사랑을 위해 기존의 삶을 모두 버렸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수도 있고,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언젠가는 죽음으로 나를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가장 어려운 윤리다.



현대의 사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사랑을 자유라고 말하면서도 상대의 연락, 위치, 인간관계, 감정까지 확인하려 한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의 자유를 침범하고,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 전체를 상대에게 맡긴다.



그러나 사랑이 삶의 전부가 되는 순간, 사랑은 삶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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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 정갑수



에밀리는 죽음으로 사랑을 붙잡았다. 안나는 삶의 모든 것을 사랑에 걸었다. 한 사람은 죽은 연인을 곁에 두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세계를 잃었다.



두 사람의 비극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우리를 가장 강력하게 묶어놓는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아름답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는 죽음조차 넘어서려는 사랑이 가장 섬뜩한 집착이 되기도 한다. 또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용기가 때로는 자기 삶을 파괴하는 극단이 되기도 한다.



좋은 사랑은 나를 잃어버리는 사랑이 아니다. 상대를 잃을 가능성까지도 품으면서 나와 당신이 함께 살아갈 공간을 만드는 사랑이다.



결국 사랑의 성숙함은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느냐에만 있지 않다.

얼마나 깊이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삶을 파괴하지 않았느냐에 있다.



포크너의 에밀리는 죽음 너머까지 사랑을 끌고 갔고, 톨스토이의 안나는 삶의 끝까지 사랑을 밀어붙였다. 두 사람은 사랑의 극한에 도달했지만 행복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어쩌면 문학이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가장 정직한 방식은 이것인지 모른다.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 때문에 삶을 잃지는 말라.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삶까지 소유하려 하지는 말라.



사랑은 삶의 전부가 아니라, 삶을 더 깊게 만드는 한 부분이어야 한다.
그 경계를 넘는 순간, 사랑은 장미가 아니라 가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