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09일 (금)

박애적 자율주행차와 에고이스트 자율주행차 판단을 기계에 맡긴다는 것의 의미

등록 :2026-02-27    조회수 212

대구경북취재본부장 이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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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41a2-69a133b7716d3-39761aad97ceec68ad6d398881aaf9b10e20716d.jpg 수필가 정갑수

 

기술은 늘 선택의 문제를 품고 등장한다. 자율주행차 역시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판단의 철학을 묻는 존재가 되었다. 특히 피할 수 없는 사고 상황에서 차량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하는 질문은, 더 이상 공상적 윤리 문제가 아니다. 빅데이터와 생화학적 알고리즘을 장착한 AI에게 판단을 맡긴다면, 그 자동차는 어떤 ‘도덕’을 운전하게 될까.
여기 두 대의 상징적 차량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하나는 박애적 자율주행차, 다른 하나는 에고이스트 자율주행차다.


박애적 자율주행차는 공리주의적 계산을 따른다. 불가피한 사고 순간, 차량은 전체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예컨대 급정거와 회피가 모두 실패한 상황에서, 차 안의 승객 한 명과 횡단보도의 보행자 다섯 명 중 누군가가 반드시 위험에 노출된다면, 이 차량은 다수를 살리는 선택을 한다. 데이터는 냉정하게 말한다. “피해 총량 최소화.”
이 선택은 통계적으로는 가장 ‘합리적’이다. 사회 전체의 안전 총량도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순간, 차 안의 승객이 느낄 감정이다. 자신의 차량이 스스로를 희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과연 소비자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인가. 박애는 숭고하지만, 구매 버튼 앞에서는 종종 망설임이 생긴다.


반대로 에고이스트 자율주행차는 탑승자 보호를 최우선 원칙으로 둔다. 어떤 상황에서도 차량은 내부 승객의 생존  확률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판단한다. 같은 위기 상황에서 이 차량은 보행자보다 탑승자를 지키는 회피 경로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개인의 안전이라는 직관적 정의감에는 부합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심리적 수용성은 높다. “내 차는 나를 지킨다.” 이 문장은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시야를 넓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든 차량이 에고이스트로 설계된다면, 도로 위의 위험은 외부 보행자와 타인에게 전가될 수 있다. 개인에게는 합리적이지만, 집단적으로는 위험을 키우는 선택이다. 게임이론이 오래전에 경고했던 딜레마다. 각자의 최선이 모두의 최선이 되지는 않는다.


이 두 모델의 대비는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 AI에게 판단을 맡긴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코드를 누가 입력하느냐의 문제라는 점이다. 알고리즘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설계자의 윤리, 사회의 합의, 그리고 시장의 욕망이 압축된 결과물이다. 겉으로는 기계의 판단 같지만, 실은 인간 사회의 거울이다.


앞으로 현실의 자율주행차는 이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서 절충될 가능성이 크다. 법과 보험, 소비자 심리, 사회적 합의가 복잡하게 얽혀 하나의 기준을 만들어 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논의를 기술자에게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도로 위의 윤리는 코드 몇 줄로 조용히 결정되기에는 너무 무겁다.


결국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차를 원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끝까지 지켜주는 차를 원할 것인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그런 선택을 기계에게 어디까지 맡길 것인가.
생각해 보면 묘한 시대다. 자동차를 고를 때 연비와 승차감만 따지던 시절이 있었는데, 미래는 그 차의 ‘도덕 성향’까지 고민해야 하고 이에 대해 치열한 논쟁과 규정에 대한 법률정비가 선행되어야 한다. 운전대는 사라지고 있지만, 인간의 윤리적 고민은 오히려 더 또렷하게 우리 앞에 놓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