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09일 (금)

철학으로 영주읽기①|소수서원 경자바위 앞에서 — 권태와 불안을 건너는 삶의 태도, 경 —

등록 :2026-06-18    조회수 504

최홍식(철학박사)

본문

영주는 사유가 풍경이 된 도시다.

 

작은 백두산이라 불리는 소백산의 능선, 화엄철학의 정수를 품은 부석사, 그리고 성리학의 정신이 살아 있는 소수서원까지 영주는 오래전부터 자연 속에서 인간을 묻고 인간 속에서 삶을 물어온 공간이다. 그래서 영주는 단순한 선비의 고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철학의 고장이다.

 

영주의 자연과 문화는 눈으로 소비하는 풍경이 아니다. 그곳은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며 삶의 속도를 늦추게 만든다. 특히 소수서원 경내 죽계 곁 경자바위에 새겨진 ‘경(敬)’ 한 글자는 오늘도 무심히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조용히 묻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b41a2-6a336bb36bfb8-4d68f39baf269acf1e16a2a0e0778dd109697f7e.jpg [사진① 소수서원 경자바위]  수백 년 동안 선비들의 사유가 머물렀던 ‘경(敬)’ 한 글자는 권태와 불안을 건너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머물게 하라고 조용히 말을 건넨다.

 

성리학은 인간을 소우주라 보았다. 인간은 우주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를 품은 존재이며 삶은 결국 자신과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에 경(敬)이 놓여 있다.

 

오늘날 우리는 경을 흔히 예절이나 공손함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리학에서 경은 훨씬 깊고 단단한 개념이다. 경은 마음을 한곳에 두는 힘이며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태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 대한 충실함은 결국 자기 삶을 완성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성리학은 이를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설명하였다. 하나에 머물러 마음을 흩뜨리지 않는 상태이다. 

또한 성리학은 거경궁리(居敬窮理), 곧 경의 태도로 삶과 세계의 이치를 끝까지 탐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삶의 진실성이 응축되면 곧 천인합일이라는 이상적 삶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경은 단순히 집중하는 기술이 아니라, 삶에 깊이 참여하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함께 깨달아 가는 태도인 것이다. 

경은 현실을 떠나는 수행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태도이다.

지나간 시간에 붙들리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흔들리지 않으며 지금 자신 앞에 놓인 삶에 온전히 참여하는 힘이다.

 

이름은 달라졌지만 오늘의 인간 역시 같은 것을 갈망한다. 우리는 그것을 몰입이라고 부른다.

무엇인가에 온전히 집중할 때 시간은 느려지고 마음은 맑아진다. 일과 사람, 관계와 배움 속에서 나와 대상의 경계가 옅어지는 순간 인간은 설명하기 어려운 충만함을 경험한다.

 

그러나 오늘의 몰입은 종종 방향을 잃는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몰입은 어느새 경쟁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우리는 수많은 일을 처리하지만 정작 한순간에도 온전히 머무르지 못한다.

 

인간은 늘 두 감정 사이에서 흔들린다.

하나는 권태이다. 익숙함이 삶의 긴장을 지워버린 상태이다.

다른 하나는 불안이다. 미래에 대한 지나친 조바심으로 지금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성리학의 경은 어쩌면 이 두 세계 사이에 놓인 외나무다리와 같다.

권태의 늪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불안의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

 

삶은 언제나 지금이라는 문으로만 들어올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라.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라.
지금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라.

 

경은 현실을 견디는 기술이 아니다. 삶의 한가운데 오래 머무는 힘이다.

 

우리는 이전 어느 시대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더 많이 소유할수록 오히려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역설 속에 살아간다. 풍요 속에서 결핍을 느끼고 수많은 관계 속에서도 쉽게 고립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성공의 기술이 아니라 오래된 마음의 기술인지도 모른다.

 

b41a2-6a336c171c608-9e4a427de6c22f807f6faae2a612134ab3afc01f.jpg [사진② 소수서원 강학당] 오랜 풍상을 견뎌낸 마룻바닥과 명종의 어필로 전해지는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판 아래, 선비들의 사유가 켜켜이 내려앉은 고요한 공간은 오늘도 우리에게 조용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소수서원 죽계는 쉼 없이 흐르지만 한순간도 서두르지 않는다. 소수서원의 오래된 철학도 같은 말을 건넨다.

 

삶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를 줄 아는 사람에게 비로소 열린다.

그리고 죽계의 물소리는 오늘도 조용히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최홍식(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