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09일 (금)

철학으로 영주읽기③|소백산, 사람을 살리는 산 - 풍경은 눈으로 보지만, 자연은 마음으로 읽는다 -

등록 :2026-06-30    조회수 416

최홍식(철학박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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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누구나 같은 산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봉우리를 보고 내려오고, 어떤 이는 산이 들려준 삶의 이치를 품고 돌아온다.

 

영주의 가장 큰 보물인 소백산은 그런 산이다. 흔히 '작은 백두산'이라 불리는 소백산은 웅장한 산세와 사계절의 아름다움으로 예부터 수많은 문인과 선비들의 발길을 이끌었다. 그들은 소백산을 오르며 시를 남겼고, 산 아래 죽계를 따라 아홉 굽이를 정해 죽계구곡(竹溪九曲)을 노래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아름다운 풍경만이 아니었다. 같은 산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은 풍경 너머에 흐르는 자연의 호흡을 읽었고, 그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야 할 삶의 이치를 찾았다. 그래서 소백산은 보는 산이 아니라 읽는 산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나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모두가 같은 세계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산을 보고, 어떤 이는 계곡을 보며, 어떤 이는 길을 본다. 그러나 자연을 마음으로 읽는 사람은 그 안에서 생명의 리듬과 우주의 숨결을 만난다.

 

소백산은 봉우리의 이름조차 하나의 철학을 품고 있다.

 

비로봉(毗盧峯)에 서면 흩어져 보이던 봉우리들이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진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야 비로소 나뉘어 보이던 산들이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비로봉의 이름이 상징하는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의 시선은 모든 분별을 넘어 하나 됨을 향한다.

연화봉(蓮花峯)도 그렇다. 연꽃은 진흙을 떠나 피는 꽃이 아니라 진흙 속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꽃이다. 연화봉은 현실을 떠나라는 산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맑은 마음을 잃지 말라고 말하는 봉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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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아래를 흐르는 죽계도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골짜기를 만나면 몸을 낮추며 굽이굽이 흘러간다. 자연은 가장 빠른 길보다 가장 조화로운 길을 선택한다. 조선의 선비들이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본받아 죽계구곡(竹溪九曲)을 노래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주자는 「무이구곡가」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산하한류곡곡청山(下寒流曲曲清) 욕식개중기절처(欲識箇中奇絶處) 도가한청양삼성(棹歌閑聽兩三聲)

"산 아래 차디찬 시내는 굽이굽이 맑게 흐르고, 그 속에 담긴 오묘한 이치를 알고 싶거든 뱃노래 두세 가락을 한가롭게 들어보라.“

 

흥미로운 것은 주자가 풍경을 보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들으라고 했다. 절묘한 경지는 눈으로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몸을 맡기고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다가온다는 뜻이다.

 

퇴계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죽계구곡(竹溪九曲)의 마지막 경관인 취한대(翠寒臺) 앞에서 경렴정(景濂亭)이란 시를 짓고 "풀에도 한결같은 뜻이 있고, 시내는 다하지 않는 소리를 머금었네(草有一般意 溪含不盡聲)"라고 노래했다.

 

주자가 자연과 하나 되어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말했다면, 퇴계는 그 귀 기울임 끝에서 풀에도 뜻이 있고 물소리에도 다하지 않는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음을 발견했다.

 

자연은 침묵하지 않는다. 풀 한 포기에도 하늘의 뜻이 깃들어 있고, 계곡의 물소리에도 우주의 질서가 흐른다. 문제는 자연이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는 데 있다. 

 

b41a2-6a438ade17542-12dbabcd07dff710f0d979522ce06450b663e4c7.jpg 백운동 취한대의 전경, 취한대, 퇴계는 소수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연화산의 푸르름과 죽계구곡을 음미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취한대를 세웠다. 취한대는 죽계구곡의 마지막 경관이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생명의 본질은 분석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직관(intuition)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주자가 들으라고 했던 자연의 소리와 퇴계가 말한 물소리 속의 뜻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한다. 자연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체험하는 생명의 흐름인 것이다.

 

오늘의 사회는 자연을 읽기보다 서로를 재단하는 데 익숙하다. 내 편과 네 편, 옳음과 그름, 진보와 보수라는 분별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공존을 잃게 만든다. 이러한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상대를 이기려는 사고가 아니라 함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이다.

 

『K-Politics』의 저자 권추호 박사가 말하는 양미론(兩未論)도 이러한 철학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상대의 장점을 받아들이며 더 높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자는 양미론은, 세상을 분별의 시선으로 쪼개는 오늘의 문명에 던지는 깊은 성찰이자 경종이다.

 

소백산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길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비로봉은 하나 됨의 시선을, 연화봉은 맑은 마음을, 죽계는 조화의 리듬을, 주자와 퇴계는 자연이 들려주는 생명의 언어를 전하고 있었다.

 

소백산이 사람을 살리는 산인 이유는 산세가 높아서가 아니다. 산을 오르며 우리의 마음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눈은 풍경을 본다. 마음은 우주자연을 읽는다.

 

소백산은 오늘도 말이 없다.

 

그러나 산을 내려오는 사람은, 올라갈 때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