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토)

악의 평범성과 한국 정치 가장 위험한 순간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멈출 때다

등록 :2026-08-11    조회수 165

정갑수

본문

 

 

 

한나 아렌트는 악의 얼굴에서 특별한 광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가 마주한 것은 잔혹한 괴물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다고 주장하는 평범한 관료였다. 그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나치의 행정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법정에서는 끊임없이 말했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아렌트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악은 반드시 악마의 얼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때로 악은 너무나 평범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리고 그 평범함은 한 가지 능력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의 상실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정치를 바라보면서 아렌트의 이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12·3 비상계엄과 그 이후의 탄핵 정국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견고하면서도 동시에 취약한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헌법과 법률, 국회와 사법기관, 시민사회의 대응이 작동하면서 헌정질서는 결국 회복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사건이 끝났다고 민주주의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지금부터다.

우리는 그 사건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정치적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의 잘못은 분명하게 보면서 내가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잘못에는 눈을 감는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영을 지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내가 지지하는 권력’이 잘못하지 않는 체제가 아니다.

내가 지지하는 권력이 잘못했을 때도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체제다.

여기에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오늘의 한국 정치에 불편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 부당한 명령을 내렸을 때 그 명령을 수행한 사람은 책임이 없는가.

정치인이 잘못된 결정을 했을 때 ‘당의 방침이었다’고 말하면 책임이 사라지는가.

공직자가 위법하거나 부당한 지시를 받았을 때 ‘상급자의 명령이었다’고 하면 면죄부가 되는가.

정치적 지지자가 자신의 지도자를 비판하지 않는 것이 충성인가.

아렌트라면 아마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당신은 그때 스스로 생각했는가?”

한국 정치의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 양극화 자체가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의견의 충돌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현실 속에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보고도 진영에 따라 전혀 다른 사실을 말한다.

같은 정치인의 행동도 우리 편이면 ‘개혁’이고 상대편이면 ‘폭정’이 된다.

같은 수사와 사법 절차도 우리 편에게 적용되면 ‘정치탄압’이고 상대편에게 적용되면 ‘정의의 실현’이 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원칙은 사라지고 진영만 남는다.

정치적 판단은 어느 순간부터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했는가’로 바뀐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퇴행이다.

12·3 사태를 둘러싼 평가에서도 마찬가지다. 헌정질서를 흔드는 행위는 어느 정권에서 일어났든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반대로 수사와 사법 절차 역시 어느 정치세력을 겨냥하느냐에 따라 정의와 탄압을 오가는 이중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원칙이 사람보다 앞서야 한다.

그것이 법치주의이고 민주주의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원칙까지 바뀐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력의 교대일 뿐이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팬덤정치다.

팬덤은 정치 참여를 활성화하는 긍정적 기능도 있다. 그러나 팬덤이 정치적 신념을 넘어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으로 변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정치인을 감시해야 할 시민이 정치인을 방어하는 사람이 된다.

비판해야 할 지지자가 변호인이 된다.

그리고 정치인은 시민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자신의 지지층을 이용해 상대방을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사실이고, 그다음은 상식이며, 마지막에는 양심이다.

아렌트가 말한 ‘사유의 부재’가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식을 많이 갖는 것이 아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신념과 반대되는 사실 앞에서 멈출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의 말이라도 틀렸다면 틀렸다고 말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의 주장이라도 옳다면 옳다고 인정하는 것.

내 진영의 잘못을 상대 진영의 잘못보다 먼저 바라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정치적 성숙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민주주의의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성숙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통령이 누구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에게 어떤 권한을 부여하고, 그 권한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다.

여당이 누구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여당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다.

야당이 누구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야당이 권력을 감시하면서 동시에 국정의 책임을 얼마나 함께 감당하는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이 이 모든 권력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이다.

권력은 시민의 열광을 먹고 자라지만, 민주주의는 시민의 의심을 먹고 자란다.

좋은 민주주의에는 의심하는 시민이 필요하다.

‘정말 그런가?’

‘법적으로 가능한가?’

‘헌법에 부합하는가?’

‘내가 반대편이라도 같은 판단을 할 것인가?’

‘우리 편이 똑같은 일을 했다면 나는 어떻게 말했을까?’

이 다섯 가지 질문만 정치의 일상에 들어와도 한국 정치의 상당 부분은 달라질 수 있다.

아렌트는 악을 막기 위해 특별한 인간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유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오늘 대한민국에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영웅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하는 시민이다.

권력이 잘못하면 비판하고, 야당이 잘못하면 비판하고, 법원이 잘못하면 비판하고, 언론이 잘못하면 비판하는 시민.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정치세력의 잘못을 가장 먼저 비판할 수 있는 시민이다.

그런 시민이 많아질수록 권력은 함부로 행동하기 어렵다.

반대로 시민이 생각하기를 멈추고 ‘우리 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기 시작하면 권력은 위험해진다.

악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침묵에서 시작되고, 무비판적 복종에서 자라며, ‘어쩔 수 없었다’는 말 속에서 평범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묻지 않는다.

“이것이 옳은가?”

대신 묻는다.

“우리 편인가?”

바로 그 순간 민주주의는 위험해진다.

대한민국은 이미 한 차례 거대한 헌정의 위기를 경험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승자의 환호도, 패자의 복수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원칙의 복원이다.

누가 권력을 잡든 헌법은 같아야 하고, 법의 기준도 같아야 하며, 잘못에 대한 책임도 같아야 한다.

정치는 사람을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권력을 길들이는 제도여야 한다.

그리고 시민은 권력의 지지자가 아니라 최종적인 감시자여야 한다.

한나 아렌트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바라본다면 아마 특정 정당의 이름부터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던질 질문은 훨씬 근본적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가?”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은 반대편에 있는 악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사유를 멈추는 나 자신일 수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는 권력자가 아니다.

헌법도, 국회도, 정당도 결국 시민의 손에 달려 있다.

생각하는 시민이 있는 한 민주주의는 살아 있다.

그러나 시민이 생각하기를 멈추는 순간, 민주주의는 제도만 남은 빈 껍데기가 된다.

아렌트가 우리에게 남긴 경고는 20세기의 역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정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명령을 따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스스로 판단하는 시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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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칼럼니스트 정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