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09일 (금)

완전수 ‘3’과 신의(信義)

등록 :2026-08-13    조회수 154

간호윤

본문

 

계절은 입춘, 입하를 거쳐 입추가 되니 엊그제 사이로 완전히 날씨가 변하였다. 찌는 듯한 폭염이 세상을 집어삼킬 듯 기세를 부리더니, 절기의 시곗바늘이 입추의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거짓말처럼 새벽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사람의 약속은 바뀌고 정치의 공약은 뒤집히며 경제의 전망은 빗나가기도 하지만, 계절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제자리를 찾아온다. 인간의 약속은 조석으로 변하고 이익에 따라 쉽게 뒤집히지만, 자연은 단 한 차례도 천시(天時)를 어기는 법이 없다.



어제 지난 칼럼을 읽은 한 지인으로부터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논어(論語)의 ‘삼인행 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이라는 구절을 다룬 글을 보고, 이를 평생의 경구로 삼아 마음에 새기기로 했다는 고백이었다. 남을 탓하고 폄하하기 바쁜 세태 속에서, 말 한마디로부터 배움을 얻으려는 그 마음이 넉넉해보였다.



그 말을 들으며 나 역시 까마득한 젊은 날, 군 복무 시절 품었던 작은 수첩 하나를 떠올렸다. 푸른 군복을 입고 거친 서리를 맞던 그 시절, 나는 수첩 첫 장에 ‘삼사후언(三思後言)’이라는 네 글자를 적어놓았다. ‘세 번 깊이 생각한 뒤에 비로소 입을 연다’는 뜻이다. 아마도 대학을 졸업하고 늦게 군대를 갔기에 내 행동을 경계하려는 의미였던 듯하다.



그러고 보니 요새 내가 말이 많다.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주머니는 열라”하였거늘, 주머니가 가벼워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진다. 가을을 맞아 스스로 경솔해지는 말을 삼가려, 오늘 새삼스럽게 숫자 ‘3’을 소환해 본다.



흥미롭게도 입추도 절기로 ‘세 번째’요, 지인이 마음에 새기려는 ‘삼인행’이나 내가 수첩에 적었던 ‘삼사후언’에는 모두 숫자 ‘3’이 관통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숫자 3은 단순한 수량적 단위를 넘어 완성, 조화, 그리고 완전함을 상징하는 ‘완전수’로 대접받아 왔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유난히 숫자 ‘3’을 좋아한다. 하나가 시작이라면 둘은 관계이고, 셋은 질서다. 그래서 셋에는 묘하게도 완전함의 느낌이 있다.


우리의 위대한 유산인 한글 창제의 원리에도 바로 이 ‘3’의 철학이 정교하게 자리 잡고 있다. 훈민정음의 모음 기본자를 만들 때 바탕으로 삼은 것이 바로 하늘(•:天), 땅(ㅡ:地), 사람(ㅣ: 人)이라는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다. 이 세 요소가 어우러져 수많은 소리를 담아내는 모음 체계가 펼쳐진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듯, 사람의 삶 역시 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조화 속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얻는다.



고대 동아시아의 해 속에 산다는 세 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三足烏)’도 있다. 다. 우리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그 모습이 남아 있다. 평범한 까마귀가 아니라 태양의 신령한 기운을 품은 존재로 형상화된 것이다. 세 개의 발을 지닌 그 독특한 형상에서도 옛사람들이 ‘3’에 부여했던 신성하고 특별한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일상 속에서도 ‘3’은 매우 정겨우면서도 단단한 수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을 정하거나 겨룰 때 ‘삼세번’이라는 말을 한다. 단 한 번의 승부로 성급히 결론 내리지 않고, 두 번의 실패에도 쉽게 낙담하지 않으며,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는 너그러움과 인내가 그 안에 담겨 있다. 단번에 상대를 재단하지 않고 최소한 세 번의 기회를 주는 문화적 여유, 그것이 바로 ‘삼세번’에 깃든 지혜다.



서양의 정신적 유산에서도 ‘3의 미학’은 빛을 발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인간 영혼을 구원하는 가장 고결한 가치로 ‘믿음, 소망, 사랑’의 세 가지를 꼽았다. 믿음이 삶의 뿌리라면 소망은 줄기요, 사랑은 그 나무가 맺는 아름다운 결실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인간의 삶은 금세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게 된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서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는 과연 계절이 보여주는 저 신실함만큼이나 타인에게 믿음직한 사람인가. 주머니가 가볍다는 핑계로 입만 바쁘게 움직이며 ‘삼사후언’의 신중함을 잊지는 않았는가. 상대에게 한 번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성급히 단죄하며 ‘삼세번’의 여유를 잃지는 않았는가. 머릿속에 하찮은 지식 몇 글자만 쌓아두고, 정작 삶이라는 실로 그것을 꿰는 일에는 게으르지 않았는가.



입추가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여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은 뜨겁고 매미 소리도 여전하다. 그러나 계절은 이미 방향을 바꾸었다. 자연은 요란하게 선언하지 않는다. 그저 때가 되면 제 길을 가며 묵묵히 약속을 지킨다. 나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한 번은 배우고, 두 번은 생각하고, 세 번은 실천하는 사람. 생각한 것이 말이 되고, 말한 것이 행동이 되며, 그 행동이 쌓여 다른 사람에게 믿음이 되는, 그런 신의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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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簡鎬允): 문학박사. 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순천향대학교(국어국문학과),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국어교육학과)을 거쳐 인하대학교 대학원(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하대 초빙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