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09일 (금)

철학으로 영주읽기⑦] ’바르게 살자’의 역설 바르게 사는 사람만 등신이 되는 세상

등록 :2026-08-14    조회수 355

최홍식(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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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살자.’ 얼마 전 영주의 한 공원에서 마주한 표지석에 새겨진 말이다. 누가 들어도 반대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이 말도 때로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쓴다. 누가 어느 시대에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양심의 기준이 되기도, 시민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명령이 되기도 한다.

 

 

이 구호를 내걸어온 바르게살기운동의 제도적 뿌리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 아래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보위 해체 뒤 국무총리 소속 사회정화위원회가 기능을 이어받았고, 1989년 4월 그 조직과 인력을 흡수한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가 민간단체로 출범했다.

 

당시 사회정화는 단순한 도덕운동이 아니었다. 신군부는 부정부패 척결과 사회기강 확립을 앞세워 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을 숙정하고, 언론인을 해직하고, 정치활동을 규제했다. 소명 기회 없이 부패와 무능의 낙인을 찍어 배제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 극단이 ’사회악 일소’를 내세운 삼청교육대였다.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가 입안한 ’불량배 소탕계획’에 따라 군과 경찰은 수많은 사람을 영장과 재판 없이 끌고 가 군부대에 가뒀다. 이들은 군사훈련과 가혹행위를 겪었다. ’교육’과 ’순화’가 국가폭력을 가린 것이다.

 

삼청교육대가 오늘날 바르게살기운동의 직접적인 전신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정화’라는 이름이 ’바르게 살기’로 바뀌었다고 해서 시민을 정화와 계도의 대상으로 바라본 권위주의적 출발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구호 자체가 아니라 작동 방식이다. 국가와 공적 조직이 바름의 기준을 정해 반복하면 ’바르게 살자’는 개인의 다짐을 넘어 시민의 행동을 이끄는 규범이 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주목한 것도 강제와 처벌 없이 사람들이 스스로 규범에 맞추게 하는 권력의 방식이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감옥·학교·병원·군대 등에 스며든 근대의 규율 권력을 제러미 벤담의 원형감옥 ’파놉티콘’에 빗대 설명했다. 수감자는 감시받는지 알 수 없어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고, 감시자가 없어도 마음속에 들어온 감시의 시선에 따라 규율을 지킨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은 전두환 신군부가 국민을 노골적으로 정화·교화하던 시대가 아니며, 푸코가 분석한 근대 규율사회도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민주사회의 시민은 국가가 가르치고 교정할 대상이 아니라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주권자다.

 

따라서 표지석을 사회정화운동이나 파놉티콘의 감시탑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호가 행정과 교육, 캠페인·평가에 결합해 반복되면 사람들은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추고 말과 행동을 검열한다. 문제는 표지석이 파놉티콘의 감시탑처럼 기능하느냐가 아니다. 국가가 원하는 시민을 만들어내려는 권위주의적 통치관이 그 구호 속에 내재해 있다는 데 있다.

 

바르게살기운동 같은 국민운동단체가 시민에게 ‘바르게 살자’고 외치는 장면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지방자치단체도 다르지 않다. 청사 벽과 보도자료에 ‘청렴’과 ‘공정’, ’친절’을 내걸면서 정작 인사와 계약, 보조금과 인허가 과정이 불투명하다면 구호는 행정을 포장하는 장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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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영주라면 먼저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선비에게 바름은 남을 가르치기 전 자신의 몸과 마음부터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수기가 앞서는 이유다. 견리사의(見利思義) 역시 남에게 의로움을 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익 앞에서 자기 욕망부터 돌아보라는 가르침이다.

 

오늘날 바르게살기운동 회원들의 봉사와 지역공동체 활동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 조직이라면 자신의 역사를 성찰하고 민주사회에서 ’바르게 산다’는 의미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공적 지원에는 공적 성찰의 책임이 따른다. 바름은 시민을 계도하는 구호가 아니라 권력과 공적 조직이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디지털과 AI 시대에는 권력의 말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 더 빠르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청렴과 공정을 말하면서 편법과 반칙으로 책임을 피하는 모습이 반복되면 ‘정부의 말은 반대로 읽어야 한다’, ’법과 원칙은 지키는 사람만 손해 본다’는 냉소가 번진다. ’바르게 살자’는 책임 없는 훈계가 되고, 마침내 ’바르게 사는 사람만 등신이다’로 뒤집혀 읽힌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와 형벌로만 다스리면 백성은 처벌을 피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했다. ’민면이무치(民免而無恥)’다. 법의 빈틈으로 책임을 피한 사람은 도리어 떳떳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만 손해를 보는 세상. 그것이 오늘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바르게 살자’의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