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09일 (금)

왕은 바뀌었지만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영화가 소환한 단종의 시대, 봉화에 남은 ‘끝나지 않은 충절’

등록 :2026-03-26    조회수 350

대구경북취재본부장 이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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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선 전기 권력투쟁을 다룬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하며, 단종과 세조를 둘러싼 비극의 역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왕위는 바뀌었지만,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경북 봉화는 바로 그 ‘변하지 않은 선택’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다.

b41a2-69c4f16932cdc-8560dcb85f579eabc4efac781ec7f01b66a2e6e8.jpg 도계서원

 

◆ 권력 밖에서 지켜낸 충절, 도촌 이수형과 도계서원

 

도계서원은 단종에 대한 절의를 평생 지킨 도촌 이수형(1435~1528)의 삶을 기리는 공간이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당시 평시서령이던 그는 단순히 벼슬을 내려놓는 데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권력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삶 전체가 부정된다고 판단한 그는, 관직과 세상과의 관계를 동시에 끊고 봉화 도촌으로 낙향했다.

그의 선택은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존재의 결단이었다.

이수형은 단종이 유배된 영월 방향을 향해 ‘공북헌’을 짓고, 평생 그곳에서 북쪽만 바라보며 살았다. 한 칸 규모의 좁은 공간, 오직 북쪽으로 난 창 하나. 이 건물은 은거의 공간이 아니라, 왕을 잃은 신하가 스스로를 가둔 상징적 장소였다.

도계서원은 이러한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서원 내 견일사(見一祠)는 ‘오직 한 임금만을 섬긴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공극루와 공북헌 역시 북극성을 향한 충성을 상징한다. 이후 금성대군 이유, 순흥부사 이보흠, 취사 이여빈 등이 함께 배향되며 이곳은 봉화를 대표하는 충절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 한 개인을 넘어 가문으로 이어진 절의, 전응방과 야옹정

봉화의 충절은 한 인물의 선택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후손에게 계승된 삶의 방식이었다.

야옹정은 야옹 전응방(1491~1554)이 조부 전희철의 유훈을 받들어 세운 정자다. 전희철은 계유정난 이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며, 후손들에게 “관직에 나아가지 말고 단종을 잊지 말라”는 뜻을 남겼다.

전응방은 이 유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평생을 야인으로 살며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매년 영월 장릉을 찾아 도포 자락에 흙을 담아 능 위에 올리고 곡을 했다는 기록은, 그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충절’을 이어갔음을 보여준다. 이는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임금을 섬기는 방식이었다.

야옹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정자로, 퇴계 이황이 쓴 현판이 전해진다. 이곳은 개인의 선택이 아닌, 한 가문이 이어온 절의의 시간 자체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기록으로 복원되는 충절의 의미, 청량산박물관

 

봉화의 충절은 건물과 인물 이야기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기록을 통해 오늘의 의미로 다시 해석되고 있다.

청량산박물관은 『봉화의 누정기』, 『봉화의 전통건축』 등의 연구총서를 통해 공북헌과 야옹정 관련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기록은 단순한 보존을 넘어 해석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박물관은 봉화의 충절을 전설이 아닌 사료로, 기억이 아닌 역사로 복원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방문객들은 단순한 문화유산 관람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선택과 가치까지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영화가 던진 질문, 봉화가 보여주는 답

 

왕은 바뀌었지만, 마음을 바꾸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도계서원이 ‘충절의 학문’을 상징한다면, 야옹정은 ‘충절의 계승’을 보여준다. 그리고 청량산박물관은 그 의미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읽어낸다.

영화가 단종의 시대를 통해 질문을 던졌다면, 봉화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권력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끝까지 지킬 것인가.

봉화의 공간들은 그 질문에 대해, 500년 동안 변하지 않은 방식으로 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