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09일 (금)

[현장취재] "소수자였기에 보였다”…장태한 박사, 미주 한인의 삶과 투쟁을 말하다 제471회 새얼아침대화서 ‘나는 소수자’ 강연…이민·차별·5·18·LA폭동 관통한 한인사의 생생한 증언

등록 :2026-09-09    조회수 236

정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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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한 박사가 9일 열린 제471회 새얼아침대화에서 ‘나는 소수자: 미국 최초 소수인종학 박사의 삶과 투쟁’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나는 소수자였습니다. 그리고 소수자였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미주 한인사 연구의 개척자인 장태한 박사가 자신의 삶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한인들이 겪어온 차별과 역경, 그리고 이를 극복해온 과정을 풀어냈다.

 

새얼문화재단은 9월 9일 제471회 새얼아침대화를 열고 장태한 박사를 초청해 ‘나는 소수자: 미국 최초 소수인종학 박사의 삶과 투쟁’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이날 강연에 앞서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내빈을 소개하고 참석자들에게 인사말을 전했다.

 

장 박사의 강연은 한 편의 미국 이민사이자 한 인간의 성장사였다. 18세였던 1974년 11월 23일, 그는 인천을 떠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이 강했던 한국 사회에서 출발해 세계에서 가장 다인종·다문화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인 LA에 도착한 순간, 자신도 ‘소수자’가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고등학교 편입이 거부되자 식당 버스보이로 일했고, 1975년 5월 31일 미군에 입대했다. 영어를 거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치른 입대시험에서 이른바 ‘찍기’로 시험을 통과하고 위생병(91 Bravo)으로 배정받았다.

 

포트 잭슨에서 새벽 5시 기상과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견디며 영어를 익혔다. 이어 독일에서 복무하면서 인종의 벽을 다시 마주했다.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당시 서독 아샤펜부르크에서 그는 한국계 유일한 병사로 백인 병사와 흑인 병사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차별과 갈등을 직접 경험했다.

그 경험은 훗날 그의 학문적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

 

군 복무 후 사회학을 공부한 장 박사는 소수인종의 역사와 문화를 소수자의 시각에서 연구하는 소수인종학(Ethnic Studies)과 만났다. 1968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의 파업을 계기로 태동한 소수인종학은 당시 미국 대학가에서 새로운 학문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장 박사는 전공을 사회학에서 소수인종학으로 바꾸며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4년 UC 버클리에서 소수인종학 박사과정이 신설된 뒤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미국 소수인종학의 역사에 중요한 이름을 남겼다. 한·흑 갈등과 한인사, 미주 한인의 정체성은 그의 연구에서 중요한 주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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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 박사에게 소수자 연구는 책상 위의 학문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들려온 비극적인 소식은 그를 다시 행동하게 했다. 당시 LA에서 한인들과 함께 광주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펼쳤고, 로스앤젤레스 적십자사를 점거해 헌혈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연대 행동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그는 미국의 주류 언론과 인터뷰하며 광주의 현실을 알렸다. 장 박사의 활동은 한인 이민사회가 단순히 미국 사회의 주변부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조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에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민사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1992년 4월 29일 LA폭동은 그의 삶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53명이 목숨을 잃고 약 10억 달러의 피해가 발생한 당시 폭동에서 한인 업소 피해는 막대했다. 장 박사는 현장에서 한인들이 겪은 공포와 절망을 지켜봤다. 특히 주류 언론이 한인들을 폭동의 맥락과 구조적 차별 속에서 바라보기보다 때로는 ‘무법자’처럼 묘사하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소수자의 목소리가 왜 필요한지를 절감했다.

 

장 박사가 이날 강조한 것은 단순히 ‘성공한 한인 이민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차별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힘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것이 생존의 방식이었던 시대를 넘어, 한인들이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하고 미국 사회에서 당당한 시민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그의 삶은 한인 이민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1970년대 미국에 도착한 한 청년은 언어 장벽과 인종차별을 넘어 군인이 됐고, 학자가 됐으며, 민주화와 인권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경험한 ‘소수자의 삶’을 학문으로 정립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장 박사는 강연을 통해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도 주문했다. 소수자는 다수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걸어온 길에서 ‘소수자’는 약자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며, 역사의 빈칸을 채우는 자리였다.

 

제471회 새얼아침대화에서 장태한 박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래서 한인 이민사에 관한 강연을 넘어섰다.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18세의 이민 청년이 미국 사회에서 마주했던 낯선 벽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벽을 넘어 자신의 목소리로 역사를 기록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장태한 박사의 삶이 보여준 것은 결국 하나다.


소수자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소수자를 위한 일이 아니라, 한 사회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기록하는 일이다.